Kunstverein Bad Aibling, Kunst in oeffentlichem Raum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난 이미 일상 속에 존재하는 오브제. 이 풍경을 산책하다 취한 사진이라고 본다면 이 오브제는 당연히 그렇게 거기에 실재한다고 생각하게된다. 가족소풍사진같기도하다. 작업기록사진인가? 추상적 오브제는 이것이 지금 설치된 것이라고 귀뜸해주지않는 한 그 곳에 있었던 사물이라고 본다. 무엇이 예술가가 제작한 것인지 공공물인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자신들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거울 같은 물의 속성. 시간을 담아두는 속성이 있다. 특히 물이 담기게 되면 거울같이 반영되는 효과가 오브제를 검은 색으로 처리했을 때 더 크다.
이것이 왜 오브제를 검은 색으로 처리했느냐는 이유이다.
가능한 평면적으로 제작해서 캔버스나 지지대 위에
이차원적 그림 같지만 얼어붙은 시간, 멈추어진 시간이 아니라 마치 영상작업처럼 변화무상한 현재의 시간과 공간을 반영한다.
자신을 스스로 볼 수 없다는 불가능을 깨고 잠시 자신만의 시간을, 비추어진 얼굴에서 자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순간은 행복한 순간이리라..
옛 석지는 단순히 아름다움만 유희하는 것 일까?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의 뇌를 잠재우고 잠시 고요한 풍경을 바라봄으로 평정의 뇌를 유지하게 하니 우리선조들의 자연 속의 깨침이 바쁘고 혼란한 스트레스의 일상, 타자와의 하모니를 꾀하려는 것이 아닐까 싶어
그 진의가 놀랍기 만하다.
자신을 잠시 돌아보는 순간이니
잠시 세상으로의 비판의 소리를 접고 ...
바쁜 일상을 잠시 뒤로 하고..
사람과의 하모니를 추구하려는 노력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비워진 뇌에 다시 채우고 숙고할 수 있게 해준다.
그 후에(평정 후에) 사람들과 같이 앉아 대화하므로
해결을 찾을 수도 있을까 싶다....
이런 행위가 나 혼자만 아니라 타자와 같이 어울리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이런 깨달음을 잠시 우리 선인들의 정원철학에서 배운다.
한국의 석지의 목적인 바라봄으로써 유희성이 있지만 보는 이에 따라 심리와 감정을 그리고 이야기를 배제할 순 없을 것 같다.
숲 속(공원-건축)에서의 나무의 물먹은 향기, 풋풋하고 싱그러운 풀 향기, 햇빛줄기, 바람의 움직임,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등은
수면 위의 더 할 수없는 우연의 변수로 작용한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고요한 상은 빗방울들에 의해 크고 작은 동심원들을 만든다.
거울과 같았던 상은 깨진다.
관찰하는 동안 자연의 순리와 원리를 알아낼 수 있고 심미적으로 철학적으로 인지해볼 수 있지 않을까.
반영된 상은 사실이다.
현실이다. 손으로 잡으려면 그 현실은 돌연 모습을 흐리게 되는 것...
"Between Water" 야외 프로젝트, 10 명정도의 예술가가 공모를 통해 선발되고 "수 간"라는 (이지역의 특성: 물) 주제 아래
작가들의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벤치와 같은 반 원형 나무조형물과 수면 위에 리플렉션을 이용한 목지를(돌를 파내어 물을 채우고 수면의 반사를 유희하는
한국 "석지"에서 영감을 받음) 주최 측이 지정해주는 장소에 설치했다.
이런 프로젝트 식의 행사에는 나는 전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른다.
그리고 행사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서로 협심한다.
독일작가들은 전시 중 서로 협심하여 설치하기때문에 배운 부분이다.
내가 스스로 프로젝트를 가지고 연구하고 컨셉을 계획해서 원하는 장소에 펼쳐보이는 경우엔 모든 부분을 스스로 조직해야한다.
자기조직같은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갤러리라는 장소나 공공장소에 행하고 있다. 제작부터 홍보, 도록, 운반까지 ...
어떤 작가든지 경험이 있으리라 싶다. 이런 경험은 강한 독립심과 자생력 스스로 해내고자하는 조직, 추진력을 갖추는데 도움이 된다.
보통 Kunst am Bau등의 공모 등을 제외하곤 이런 프로젝트행사 (Kunstverein Aibling) 의
행사 지원금은 백만원 아래다. 보통 자비가 제작하는데 더 들어가는 경우가 다반사(차 마시고 밥 먹는 일같이 예사로운)다.
그래서 보통은 자신의 자본을 작품제작에 고스라니 쏟아 붓기 마련이다. 자본을 모으기보단 다음 작업에 백퍼센트 투자한다.
다음 작업이 자본을 창출한다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체 말이다.
사실 이런 경운 (야외 실내설치와 작업실에서의 일상적 작업행위) 생계 때문이 아니라 작가자신이 상상하고 꿈꾸어 왔던 생각을
(보통 꿈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몽환적 환타지Luftschloss와는 다른 뜻, 계획한 것 Vorstellung) 현실화하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재료와의 교제(나무는 파괴에 의해 다시 조각으로 창조된다), 기쁨과 실습에 의한 신체적 노농의 땀, 열량을 내기위한 에너지원(밥), 수면, 음악,주위의 일상의 삶과 책 속의 경험과 느끼기, 행인 &지인 &가족과의 대화, 통과- 통로- 머무름- 경유-도착을 통한 기억수집, 답사, 통과, 시 공간적 세계의 인식, 기억현상, 이런 모든 것을 통한 스스로를 만들어 가려는 존재의 제스쳐, 벅차오르는 완성의 행복감, 보람, 쾌감, 전시 후에 사람들과의 교류, 공감을 위한 대화( 완성 후에 일반인과의 대화) 등이 결정체를 이루어 빛을 바래는 과정 같다.
에너지와 사고와 감정이 재료와 만나 몸을 이루는 것이다.
(결정체는 시각적으로 보여지고 오감을 통해 느껴질 수 있다. 비 물질로(소리) 감지될 수도 있다. 공감은 느낌을 절대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느낌은 사람이나 생물체라면 일종의 반응이다. 무수한 전시와 음악회 특히 일상과 자연에서도 감성이 키워질 수 있다. 우리의 일상 삶 자체는 반응을 일으키는 덩어리같다)
이 몸(결정체)은 전시를 통해 뷰어 (보는 이)와의
최종적 교감의 행위를 통해 진정으로 빛을 바랜다.
(직접 신체적으로 사용하므로 또는 그 주위를 걸어 다니면서 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 존재를 더욱 친밀히 한다.)
때론 험한 강 위의 다리와 같은 교량이다.
이것이 나의 예술 활동이다.
그것은 단지 미완성된 삶의 과정이다.
예술행위는 끝없는 미지에로의 여행과도 같다. 가는 도중이다.
스스로 삶 속에서 경험한 의문을 쉼 없이 자문하는 일이다.
이것은 일종의 설레임이다. 때론 고통이다.
원하는 아픔이다.
Sehnsucht 그리움의 손짓이다.